정진욱은 주로 버려진 사물들과 기능을 다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작업을 한다. 그는 이것을 통하여 세상을 인지하고 본인이 마주한 세상에 대한 태도를 작업으로 풀어낸다. 부여받은 기능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가차 없이 버려지는 곳이 그가 인지한 세상이자 현실이다.
그의 작업들은 고요히 그러나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투쟁의 의지를 비춘다. 이것은 다만 상대를 이기거나 극복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의 시야로부터 벗어나거나 상대가 정해놓은 싸움의 룰을 어김으로서 작동한다. 그렇기에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작업에는 미묘한 긴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 한 우물파기 >와< 한 자루의 생각 >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 그의 작업과정은 마치 노동자와 수도자의 중간 어디쯤의 일인 듯 보인다. 해변의 어느 곳, 움푹 파여진 < 한 우물파기 >는 파도가 밀려오면 사라질 듯 위태롭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구덩이를 파고 몸을 숨기고 그 안에서 물을 찾는다. < 한 자루의 생각 >에서는 둔한 칼을 갈아 세상을 향해 겨눌 것처럼 보이나 그의 행위는 멈추지 않고 칼 본연의 모습마저 파괴하기에 이른다. 본래 주어진 기능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난 칼은 더 이상 칼이 아니다. 이 모습은 마치 부여받은 기능을 전복하고 본인의 기능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녹이 슬어 쓸모가 없어진 못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 가느다란 실 탑으로 만든 < 일반적 >에서는 버려진 못들이 연대하여 천장까지 이어지는 탑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본래의 기능을 하지는 못하나 이들은 부서질 듯 보이는 손을 마주잡고 간간히 벽에 기대기도 하며 아무쪼록 하나의 탑이 된다. 이 모습은 사뭇 뭉클하기까지 하다. < 하나이자 전체인 >에서는 거대한 젠가 탑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나뭇조각에 작가의 희망과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문구들을 섞어 적어놓았다. 관객은 이것을 함께 쌓아올리며 무거운 현실과 작가의 희망으로 탑을 만든다.
< 기능을 잃은 이의 이의 >에서는 ‘우리는 누구로부터 기능을 부여받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어쩌면 뒤틀린 각목은 어느 건축물의 일부가 되기 싫어 뒤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뒤틀려 버려진 각목을 포착한 그는 전시장 어귀에서 빛나게끔 형광등을 달아주었다. 세상에서 쓸모없어진 물건들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다른 곳에서 쓸모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기능을 잃은 듯 보여도 부여된 기능과는 다른 방법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정진욱이 버려진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자기와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선은 가장 최근작인 < H2KO015 - c >에서 잘 드러난다. 화이트큐브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노란색의 별들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평면에 띄엄띄엄 존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별자리의 별들이 그러하듯, 별 하나와 다음 별 사이에는 몇 발자국의 공간과 시간. 이산화탄소와 산소와 먼지와 엄연히 대기라 부를만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가늠 할 수 없는 일들이 두 별사이에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단숨에 무엇을 정의내리고 확신하는 것은 그것의 의지나 태생과 관계없는 기능의 부여만큼이나 잔인하다는 것을 이 작업은 말하고 있다.
정진욱의 작업 안에는 실체도, 형상도 없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개인들이 있다. 이들은 마주한 상황 앞에서 담담히 자신의 세계를 굳건히 하기도 하고, 거대한 벽 앞에 선 작은 개인이 또 다른 작은 개인을 감싸 안고 위로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세상을 향한 ’태도‘라 명명하였지만, 이것은 다만 태도에 지나지 않고 보는 이를 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